장봉운
영성 훈련 카페 치유의 집 http://cafe.godpeople.com/healinghouse
우리 영혼 안에는 여러 움직임들이 나타난다. 그 여러 움직임들이 바로 식별해야 할 대상들이다. 가장 기초적인 영성적 위안과 영성적 고독을 “영신 수련”에서 서술하고 있다. 영성적 위안은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과 그 영광과 사랑 때문에 흐르는 눈물 등의 강한 감정을 동반한다. 그것은 조용하면서 깊은 감정의 움직임을 경험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주님 안에서의 평강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감정의 증가이며, 나를 주님에게로 끌어들이는 내적인 기쁨이다. 이냐시오가 영성적 위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느낌에 관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느낌을 식별하는 것이지 생각을 식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느낌이 없는 경우라면(이냐시오의 선택에 있어서 세 번째의 경우를 말한다. 내적인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상태이다.) 이 때는 우리의 이성에 의존해야 하며 그래서 자신의 선호도를 측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이러한 이성적인 상태보다는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보다 적합한 영성 식별의 상태라고 믿는다.
우리는 자주 감정의 차원을 넘어 냉철한 머리로 선택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감정은 매우 변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니 기도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감정은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여기서 비로소 영성적 진보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진보를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느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첫째, 느낌이 우리의 영성 생활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필연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느낌은 매우 변하기 쉬운 것이기에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따라서는 안된다. 이러한 느낌의 복잡성을 이냐시오는 영성적 위안과 영성적 고독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영성적 고독에 대해서 이냐시오는 영성 규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의 감정적 소동(어지러움)으로부터 냉담과 비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모든 영성적 고독의 공통적 특징은 ‘평강의 상실’이다.”
영성적 위안과 영성적 고독이란 느낌의 상태인데, 그것은 생각 혹은 행동하려는 영감으로 이어진다. 즉 식별이란 기도와 행동이 만나지는 곳이다. 그것이 순수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경험은 언제나 행동과 사랑의 보답으로 인도된다. 그래서 아빌라의 테레사는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영혼의 성”, 제4궁방, 제1장 이 글은www.catholicfirst.com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 식별이란 느낌과 지성과 의지가 모두 동원되는 전인적인 작업이다. 느낌은 식별의 원자료이고, 이 원자료를 판단하고 이 느낌들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것은 지성이다. 그리고 이 판단에 기초하여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의지이다. 그러므로 느낌 없는 식별의 전과정은 내용이 없는 것과 같다.
1) 영혼의 성향과 영들의 움직임의 상태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자신의 느낌과 부딪힘이 있어야 한다.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영감있는 행동을 위하여 그러한 느낌들이 건강한 바탕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어떤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 이냐시오는 두 가지의 독특하고 상반된 영혼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 상태는 죄로부터 또 다른 죄로로 옮아가는 영혼의 상태가 있다. 즉 근본적인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악한 영은 표면적인 향락을 제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영은 감각적인 즐거움과 쾌락으로 그의 상상을 채운다. 반면에 선한 영은 그의 행동이 원수인 악한 영의 행동과 정반대이다. 즉 이성의 빛을 사용하여 표면적으로는 영성적 고독과 더불어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게 한다. 이와같이 그 근본 성향이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있는 사람은 악한 영에게 위안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혼란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하고, 반면에 선하신 하나님은 악한 영으로부터 오는 만족감을 흔들어 깨우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위의 상태와는 정반대로 죄로부터 자기의 영혼을 정화하기에 열심이고 더욱 완덕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는 영혼의 상태가 있다. 그러한 영혼은 삶의 근본적인 성향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를 섬기는 일을 선택한다. 그러한 경우 혼란과 영성적 고독은 악한 영으로부터 오고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이 두 기본적인 영혼의 상태를 일곱 번째의 규범에서 이렇게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러 영들의 움직임들을 스폰지나 돌위에 떨어지는 물에 비유하고 있다. 이 영혼의 성향이 영들의 성향과 정반대의 상태라면, 그들은 물이 바위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소란하고 요란하다. 그 성향이 비슷하다면 물이 스폰지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조용하다.
2)초심자와 영성적 고독
영성 식별에 있어서 영성적 고독은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징조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나쁜 징조만은 아니다. 영성적 고독이란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불편하게 생각하신다든가 혹은 그를 향한 우리의 헌신이 다소 게으르다는 표시만은 아니다. 영성적 고독은 종종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정화시키고 심화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영성적 고독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의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허락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욥기서가 다루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두운 밤, 메마른 샘, 미지의 구름 등은 영성적으로 열심인 사람들에 의해서 경험되는 정화의 과정이며, 그러한 경험의 초기 단계에서 보통 경험하는 것이 영성적 고독이다.
영성적 고독이 일어날 때의 이냐시오의 조치는 이렇다. 영성적 위안에서는 선한 영이 우리를 인도하고 자문을 해주지만, 영성적 고독에서는 악한 영이 인도하고 자문하기 때문에 우리가 악한 영의 인도를 받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에서 결코 어떤 결정을 해서는 안되며 이전의 결정을 변개시켜서도 안된다.
영성적 고독을 경험할 때는 영성적 고독에 저항하는 활동을 강화시킴으로써 영성적 유익을 얻게된다. 영성적 고독이 주는 영감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하나님이 악신으로 하여금 영성적 고독을 일으키도록 허락하시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영적으로 나태한 경우, 둘째는 우리가 영성적 위안 없이 영적으로 얼마나 진보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셋째 우리에게 참된 자아의 이해와 지식을 전해주기 위함이다.
3)헌신자와 영성적 위안
이미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영성 훈련의 첫째 단계에서는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하나님과의 정직한 대면으로 나아가는 회심의 시기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첫단계에서 비워진 심령을 그리스도로 채워가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의 가치와 태도가 두 번째의 단계에서 우리의 것이 된다. 두 번째 주간의 규범에서는 주로 영성적 위안을 다룬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영성적 고독은 보통 초심자에게 일어나는 중대한 경험인 반면에 영성적 위안은 보다 헌신된 영혼에게 일어나는 경험이다.
영성적 위안은 영성적 고독과는 달리 하나님의 음성의 징조이며, 영혼은 영성적 위안으로부터 오는 영감은 마음놓고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악한 영의 책동에 있다. 악한 영은 거짓의 아버지로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식별되어져야 한다. 이냐시오는 영성적 고독이 참으로 악한 영으로부터 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영성적 고독은 참 영성적 고독이며(거짓 영성적 위안은 있을 수 있으나 거짓 영성적 고독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본성상 결코 사단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영성적 고독을 일으키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적 위안은 속임수가 가능하다. 영성적 위안은 선한 영으로부터도 악한 영으로부터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영성적 위안이 무엇인가를 식별해야 한다. 악한 영도 황홀경과 환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고상한 인간적 계획과 사도적 열정을 부추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전체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마귀의 꼬리를 찾아내야 한다.
4)선한 영(the good spirit)과 악한 영(the evil spirit)
이냐시오는 하나님 자신과 선한 영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만 이유 없는 위안을 줄 수 있는가 하면, 반면에 이유 있는 위안은 선한 영이나 악한 영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전자는 감각적인 인식이나 중개 없이 영혼이 직접 감지할 수 있는 위안이며 후자는 감각을 통해서 온다. 이러한 구분은 선한 영을 천사들의 활동으로 보는 중세신학의 분위기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선한 영을 하나님 자신 혹은 성령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악한 영은 매우 복잡하다. 이냐시오는 악한 영을 악한 것 혹은 자주 원수, 우리의 원수로 언급한다. 우리의 진보나 영원한 구원에 대한 원수를 악한 영이라고 하고, 우리 본성의 원수라고 한다. 어쨌든 이냐시오는 악한 영은 실존하는 악의에 찬 행동을 유발하는 마귀라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영성 식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자연적인 본성으로부터 오는 것이든 분명하게 마귀적인 것이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면 악한 영 혹은 마귀로 받아들일 수 있다.
# by 티파니에서아점을 | 2005/10/03 02:28 | faith | 트랙백 | 덧글(12)